본문 바로가기
조선 궁궐 미스터리/금기된 장소 - 궁궐 건축과 풍수의 수수께끼

궁궐 지붕 위 11개의 인형: 잡상이 지켜온 600년의 비밀

by 역사 미스터리 헌터 2026. 6. 2.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고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나라였다. 그러나 경복궁 지붕 위에는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교의 나라가 서유기 인물에게 왕실 수호를 맡긴 진짜 이유를 잡상의 배치와 위계 속에서 추적했다.

 

궁궐 지붕 위 11개의 인형: 잡상이 지켜온 600년의 비밀
경복궁 경회루 추녀마루의 잡상. 대당사부를 선두로 11기가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국가유산포털, 2022, 공공누리 제1유형

잡상이란 무엇인가: 조선 왕궁 지붕 위 낯선 존재들

잡상은 궁궐이나 사찰 등 중요 건물의 추녀마루 위에 일렬로 세운 작은 도자 조각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자로는 '잡다한 형상들'이라는 뜻이지만, 그 이름이 암시하듯 여러 종류의 인물이 혼재된 독특한 집합체다. 현재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등 조선 5대 궁궐의 주요 전각 지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잡상은 항상 홀수로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건물의 격(格)에 따라 그 숫자가 달랐다. 가장 낮은 격의 건물에는 3개, 최고의 격을 지닌 건물에는 11개까지 올릴 수 있었다. 현존하는 궁궐 건물 중 잡상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복궁 경회루로, 11개의 잡상이 추녀마루 위에 배열되어 있다. 이 숫자 자체가 경회루가 조선 왕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지닌 건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잡상을 올리는 행위는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엄격한 의례적 규범에 따른 것이었으며, 함부로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서유기 인물들은 왜 조선 궁궐 지붕에 올랐나

잡상의 구성을 살펴보면 첫 번째 자리는 항상 대당사부(大唐師傅), 즉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차지한다. 그 뒤를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 마화상(馬和尙) 순으로 배치하며, 이후에는 이귀박(二鬼朴), 삼살보살(三殺菩薩), 나토두(羅土頭) 등 정확한 원전을 특정하기 어려운 인물들이 뒤따른다. 이 배열은 『서유기』의 취경(取經) 여정, 즉 삼장법사 일행이 서쪽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를 지붕 위에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서유기』는 조선에 명나라를 통해 유입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문인과 왕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흥미로운 점은 삼장법사가 맨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삼장법사는 신통력이 없는 인물이지만, 일행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상징적 권위를 지닌다. 이는 지붕 위 잡상의 배열이 단순한 신화적 나열이 아니라 위계(位階)와 질서를 시각화한 것임을 시사한다. 잡상의 일행이 악귀보다 앞서 나아감으로써 궁궐을 향해 다가오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진로에서 차단한다는 관념이 그 배치에 깔려 있다.

벽사의 관념: 잡상은 어떻게 귀신을 쫓는다고 믿었나

조선 왕실이 잡상에 기대한 역할은 명확하게 '벽사(辟邪)', 즉 사악한 기운과 귀신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이 관념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는 하늘과 인간 세계가 만나는 경계로 인식되었다. 경계에는 악령이 침입하기 쉽다는 믿음이 있었고, 따라서 그 경계를 수호하는 존재를 세우는 풍습이 생겨났다. 조선은 이 전통을 수용하면서 서유기 인물이라는 독특한 선택을 더했다. 손오공은 72가지 변신술과 여의봉을 지닌 존재로, 어떤 귀신도 당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저팔계와 사오정 역시 각자의 신통력으로 일행을 보호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을 지붕 위에 세움으로써 궁궐은 사방에서 스며드는 나쁜 기운에 대한 영적 방어막을 구축하려 했다. 실제로 민간에서도 지붕에 기와 조각이나 동물 형상을 올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왕실은 이를 훨씬 정교하고 위계화된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잡상이 지닌 벽사의 관념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당대 왕실의 우주론적 세계관이 건축에 투영된 결과였다.

유교 국가 조선이 서유기 인물을 선택한 역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나라였다. 그러나 궁궐의 지붕 위에는 불교 승려인 삼장법사와 도교적 신통력을 지닌 손오공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명백한 역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은 이를 '실용적 절충주의'의 산물로 해석한다. 왕실은 공식적으로는 유교 의례를 따랐지만, 실제 삶의 불안과 공포, 특히 궁궐을 위협하는 초자연적 위험에 대해서는 기존의 주술적 전통에 의존했다. 잡상은 그 타협의 산물이었다. 또한 잡상은 공식 문서나 의례에 기록되지 않는 '비공식적' 장치였기 때문에, 유교 원리주의자들의 비판을 피하면서도 벽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잡상에 대한 직접적인 논쟁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잡상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지붕 위에 존재함으로써 유교 이념과 민속 신앙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했다.

잡상의 재료와 제작 방식: 장인들의 숨겨진 기술

잡상은 일반적으로 회색 점토를 구워 만든 청회색 도자 조각이다. 제작은 와장(瓦匠), 즉 기와 제작 전문 장인들이 담당했으며, 이들은 단순한 기와 제작자가 아니라 왕실 건축 의례에 참여하는 전문 기술자였다. 잡상의 형태는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어 각 인물의 특징을 최소한의 조형으로 표현한다. 삼장법사는 승복을 입은 형태, 손오공은 금관(金冠)과 여의봉을 가진 원숭이 형태로 구분되는 식이다. 크기는 대체로 20~30센티미터 내외로 작지만, 지붕 위에 세워졌을 때 원거리에서도 형태가 구분되도록 설계되었다. 잡상은 추녀마루 기와 위에 회반죽으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설치되었으며, 태풍이나 강한 비바람에도 이탈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부착되었다. 궁궐 수리 시에는 잡상의 파손 여부를 점검하고 손상된 것은 교체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조선 시대 잡상의 실물이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장인들의 조형 수준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궁궐별 잡상 배치 현황 비교

궁궐 및 건물잡상 수첫 번째 인물특이사항
경복궁 경회루 11개 대당사부 현존 최다 잡상 건물
창덕궁 인정전 7개 대당사부 조선 왕조 정전(正殿)
창경궁 명정전 7개 대당사부 현존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
경복궁 근정전 7개 대당사부 법궁(法宮) 정전
덕수궁 중화전 5개 대당사부 대한제국 시기 건립
일반 궁궐 부속 건물 3개 대당사부 격이 낮은 부속 전각

이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잡상의 수는 건물의 위계를 직접 반영한다. 왕이 공식 업무를 보는 정전은 7개, 가장 중요한 누각인 경회루에는 11개가 배치되었다. 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조선 왕실이 공간의 위계를 얼마나 세심하게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잡상에 얽힌 오해와 진실: 민간 전설과 역사 기록 사이

잡상과 관련하여 대중에게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는 잡상이 화재를 막아주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물과 관련된 신통력을 지닌 존재들이 지붕 위에 있어 불을 예방한다는 민간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잡상의 주된 기능은 화재 예방보다는 광범위한 벽사, 즉 모든 종류의 부정한 기운을 차단하는 것으로 본다. 또 다른 오해는 잡상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도입되었다는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에 궁궐 건축이 크게 훼손되고 변형된 것은 사실이지만, 잡상 자체는 조선 전기부터 이미 존재했던 전통이다. 조선 전기 건축 관련 기록과 현존하는 건물 연구를 통해 잡상이 조선 고유의 건축 문화로 정착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잡상의 수가 건물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 단순히 미적 취향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이는 엄격한 의례적 규범에 따른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잡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는 것: 조선 왕실 세계관의 흔적

잡상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겉으로 표방한 이념과 내면에서 실제로 작동한 신앙 체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다. 성리학의 합리주의를 내세우면서도 귀신을 두려워하고, 이단으로 규정한 종교의 인물들을 궁궐 지붕 위에 세웠던 왕실의 태도는 단순히 이중성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극한의 불안 앞에서 취하는 보편적인 행동 방식에 가깝다. 아무리 강력한 이념도 죽음과 재앙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오늘날 경복궁과 창덕궁을 찾는 방문객들이 잡상을 볼 때, 그 작은 인형들이 지닌 수백 년의 맥락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조선의 궁궐은 단순한 역사 유적을 넘어 살아있는 이야기의 공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잡상은 오늘도 지붕 위에서 묵묵히 궁궐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진짜 귀신을 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자리를 지켜온 것만은 분명하다.

지붕 위 잡상 FAQ

Q1. 잡상은 조선 시대에만 존재했나요, 다른 나라에도 있었나요?

잡상과 유사한 지붕 위 수호 조각상 전통은 중국과 한국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주수(走獸)'라 불리는 동물 형상의 조각이 황실 건축 지붕에 배치되었으며, 조선의 잡상은 이 전통에서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학계는 본다. 일본에도 지붕 장식 문화가 있으나 잡상과 동일한 형태는 아니다. 조선의 잡상이 특이한 점은 서유기라는 특정 서사를 기반으로 인물의 위계와 순서를 명확히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지붕 장식 전통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Q2. 현재 궁궐의 잡상은 조선 시대 원본인가요, 복원된 것인가요?

현재 궁궐에서 볼 수 있는 잡상 대부분은 조선 시대 원본이 아닌 근현대 복원품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궁궐 건축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본 잡상도 상당수 소실되거나 손상되었다.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은 남아 있는 원본 잡상을 수장고에 보존하면서, 궁궐 건물에는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복원품을 설치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조선 시대에 실제 제작된 잡상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

Q3. 일반 가정집이나 사찰에도 잡상을 올릴 수 있었나요?

조선 시대에는 잡상의 사용이 왕실 건축과 일부 고위 관청 건물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반 사대부 가옥이나 민가에는 잡상을 올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건축의 위계가 곧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던 조선의 법도에 따른 것이었다. 사찰의 경우 일부 중요 전각에 유사한 장식 조각을 올리는 사례가 있었으나, 잡상이라는 명칭과 서유기 인물 배열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은 궁궐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었다. 조선이 건축을 통해 신분과 권력의 경계를 얼마나 세밀하게 관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참고자료

  1.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궁궐의 건축과 장식』, 국립고궁박물관, 2013
  2.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잡상(雜像)' 항목, 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화재청, 『경복궁 복원 정비 보고서』, 문화재청, 2015

 

작가의 생각

잡상을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참 솔직한 나라였구나'였다. 이단이라 규정하면서도 두려움 앞에서는 손오공을 불러다 지붕 위에 세웠다. 이념보다 불안이 먼저였던 것이다. 조선의 왕도, 결국 귀신이 무서운 사람이었다.

 

* 함께 읽으면 좋을 글

 

물속에 잠긴 조선의 기억 — 춘당지, 시험장에서 유원지까지의 100년

춘당지는 풍류를 위한 연못이 아니었다. 왕이 직접 과거를 주관하고 백성의 농사를 살피던 조선 의례의 핵심 공간이었다. 일제는 그 자리에 유람선을 띄우고 벚꽃을 심어 식민지 유흥의 무대로

www.chaechaepapa.com